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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홍주이 씨(洪州李氏)의 시조 이유성(李維城).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록.

by gwangyeob5958 2024. 9. 10.

❏ 홍주이 씨(洪州李氏)의 시조 이유성(李維城)

홍주이 씨(洪州李氏)의 시조 이유성(李維城)은 고려 시대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이간(李幹)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의종·명종·신종·희종 대에 걸쳐 활동하였는데,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와 정당문학(政當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홍주 이 씨 시조의 배위(配位)  할머니는 광산 김 씨 6세이시다.

찬성공 시조 이유성 자순 분파도와 해풍군 이사손 분파도

 

 

 

 

 

이유성(李維城)은 믿음으로 벗을 사귀었으며[交友以信], 일이 생기면 굳세고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전라도(全羅道)를 안찰(按察)하고 한산군(漢山郡)을 지키면서 모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왕준명(王濬明)이 화를 입었을 때, 그 동생인 정언(正言) 왕경의(王景儀)도 연루되어 유배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최충헌(崔忠獻)을 두려워하여 전송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옛 친구인 이유성은 사람을 보내어 전송하고, 압송하는 관리에게 백금(白金) 30량(兩)을 주어 조금이라도 덜 핍박받게 하였다.

 

왕경의가 감동하여 목이 메여 우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고종(高宗) 초에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가 되었는데,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고 관기(官妓)에게 현혹되었는데,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었다.(고려사 > 권 100 > 열전 권제 13 > 제신(諸臣)), (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 14 > 고종안효대왕(高宗安孝大王) > 고종(高宗) 2년(1215) > 5월)

 

무신집안 출신으로 공을 세우고 벼슬도 잘했으며, 의리도 좋은 인물로 나온다. 말년에는 서경(평양) 시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마지막에 스캔들이 가득하다.

 

관기에게 현혹되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이야기. 이게 따로 기록될 정도라면, 당시 소문이 많이 났던 모양이다. 1211년 12월에 왕준명이 희종과 짜고 최충헌을 제거하려 했다가 실패한 사건이 여기 언급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사망한 이야기가 따로 실려있고, 간략한 소개가 함께 있다. 여기에는 관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기록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의 역사책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215년(고종 2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모두 비슷한 내용으로 등장하는데, 연도별 기록을 알아보기 쉬운 고려사절요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명종 9년인 1179년 3월이다. 이 당시 문신인 정국검의 사위로 등장하여 불량배를 잡아들였다.

◆ 수정봉의 도적을 체포하다

소경(少卿) 정국검(鄭國儉)이 수정봉(水精峯)의 도적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수정봉은 길이 어둡고 험난하여 불량배[惡小] 5·6인이 항상 그곳에 모여 아름다운 부녀자를 보면 반드시 겁탈하고 그 옷과 물건을 빼앗았다.

 

정국검의 집이 수정봉 아래 있었는데, 문득 보니 한 부인이 잘 차려입고 봉우리길을 따라 내려가자 도적들이 기다리다가 위협하여 붙잡았고 따르던 계집종들은 모두 흩어지니 정국검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자신의 사위 이유성(李維城)과 최겸(崔謙)으로 하여금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잡게 하였다.

 

도적들이 맞서서 공격하기를 매우 급히 하였으나 이유성 등이 힘써 싸워 3인을 체포하여 신문하니 곧 대장군(大將軍) 이부(李富)의 조카 및 권문(權門)의 아들과 조카들이었으므로, 사사로운 청탁이 이리저리 얽히게 되어 법관(法官)이 다스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조문식(趙聞識)만이 홀로 항의하면서 〈불량배들을〉 국문하여 죽이니 당시 여론이 통쾌해했다.(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 12 > 명종광효대왕1(明宗光孝大王一) > 명종(明宗) 9년 (1179년) > 3월)

 

고려사에도 같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 내시 이유성(李維城)과 영동정(令同正) 최겸(崔謙)에게..."라고 관직이 나온다. 이 당시 내시는 조선시대 환관과는 다른 것으로, 국왕 가까이에서 제반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장인인 정국검도 한때 내시였다. 이름이 먼저 나온 것으로 보아 첫 사위였을 것이다. 이때를 대략 20세로 잡는다면, 사망한 1215년에는 55세 정도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 인물 편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 경주 토벌군의 전공을 포상하다

무신으로의 활동상이 소개된 것은, 위에 나온 전라도, 한산군을 지킨 것 이외에 반란군 토벌에 대한 것이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 부흥을 내세우며 1202년에 일어난 반란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서 결국 중앙군이 파견되었다.

 

정언진(丁彦眞)은 신종(神宗) 5년(1202)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지자심(池資深)이 아뢰기를, “경주의 적도(賊徒)들이 항복을 요청하였으니 반드시 군사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충헌(崔忠獻)이 노하여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형부시랑(刑部侍郞) 전원균(田元均)을 부사(副使)로, 대장군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로,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이(李頤)를 부사로, 섭대장군(攝大將軍)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지합문사(知閤門事) 이유성(李維城)을 부사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을 서둘렀다.(고려사 > 권 100 > 열전 권제 13 > 제신(諸臣) > 정언진)

 

이때 벌인 작전 중에 이유성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있다.

 

적들이 기계현(杞溪縣)을 노략질하자 이유성(李維城)이 군대를 진격시켜 공격하니 적의 우두머리 패좌(孛佐)가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고는 도망하려 하였다. 장군(將軍) 방수정(房秀精)이 두 아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 힘을 다해 공격하자, 사졸(士卒)들도 그 틈을 타 〈적의 머리〉 1,000여 급(級)을 베고 25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려사 > 권 100 > 열전 권제 13 > 제신(諸臣) > 정언진 > 정언진이 남적의 반란을 진압하다)

 

최충헌(崔忠獻)이 최광의(崔匡義)·이이(李頤)·강순의(康純義)·이유성(李維城) 등이 경주(慶州)를 평정한 공이 가장 많다고 하여, 상주(上奏)하여 먼저 돌아오게 하고 작(爵)과 질(秩)을 더해주었다. 부관[寮佐] 이하 제군(諸軍)에게도 상(賞)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고려사절요 > 고려사절요 권 14 > 신종정효대왕(神宗靖孝大王) > 신종(神宗) 7년 (1204년) > 1월)

 

족보에는 정당문학, 찬성사, 서경부유수를 지낸 것으로 나온다. 평양에서 돌아가셨으니, 그곳에 묘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보인다.

 

홍주 이 씨 시조는 이유성(李維城). 1081년 개경(현 개성)에서 출생해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무관이면서 유교에도 뜻이 깊었으며 '안평(安平) 이 씨 시조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 : 홍성신문(http://www.hsnews.co.kr)

사실 11세 문간공 이서의 출생년(1332년)을 기준으로 10세대를 1215년에 사망한 이유성 사이에 짜아 넣기는 힘들다. 정국검의 사위일 때의 일화로 보아 대략 1150-1160년생일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한 세대에 18년 밖에는 되지 않는다. 몇몇 알려진 날짜만 따져봐도 그 보다 한 세대가 훨씬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1081년을 생년으로 잡으면 한 세대가 25년이 조금 넘으므로 훨씬 잘 맞는다. 이 경우는 우리 시조 이유성이 서경 부유수를 지낸 이유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유성 1081년생 설이 틀리고 서경부유수 이유성이 맞다면 10대 이기종으로부터 시조까지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일부 문헌으로 보면 중시조 이기종이 10 세손이 아니라 8 세손으로 계산되기도 한다. 후세에 정리하며 실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 2세 이천소(李倩笑)

태자첨사(太子詹事 - 종 3품 동궁 근무), 평장사(平章事)

▶ 3세 이권(李鬈) 

우복야(右僕射), 평장사(平章事)

▶ 4세 이응송(李應松)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 - 비밀 취급 종 2품

▶ 5세 이윤(李昀) 

정당문학 - 어떤 문헌에는 6세 연수가 응송의 아들로 나온다.

❏ 고려 시대 대장군(大將軍)

고려시대 대장군(大將軍)은 2군 6위(二軍六衛)에 속한 종 3품 무관직으로 중앙군 사령관의 역할을 맡았다. 2군 6위는 고려시대의 중앙군 조직으로 2개의 군(軍)과 6개의 위(衛)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군에는 상장군(上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이 1명씩, 각 위에는 장군(將軍)이 1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대장군은 군의 지휘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평상시에는 군사 훈련과 교육을 담당하고, 전시에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중앙 정부의 중요한 군사 회의에 참여하여 국가의 군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서경부유수는 고려시대 서경(西京, 현재의 평양)에 설치된 관직으로, 서경유수(西京留守)의 차관 역할을 맡았습니다. 서경유수는 서경 지역의 행정, 군사, 재정 등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지방관이었으며, 서경부유수는 서경유수를 보좌하고 그 부재 시 업무를 대행했다.

 

서경부유수는 중앙 정부에서 임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4품 이상의 관료가 임명되었습니다. 서경부유수는 서경 지역의 중요한 관직이었기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 임명되었다.

 

서경부유수의 역할은 서경부유수는 서경 지역의 중요한 행정, 군사, 재정 사무를 처리하고, 서경 지역의 치안 유지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서경 지역의 백성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중앙 정부와 서경 지역의 소통을 책임지기도 했다.

❏ 정당문학(政當文學)

정당문학은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설치된 종 2품 관직이다. 문종이 정원과 품계를 정하여 정원은 1인으로 하고 품계는 종 2품으로 하였다. 1275년(충렬왕 1)에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게 되어 관제의 격하개편이 이루어질 때 참문학사(參文學事)로 고쳐 불렸다가, 1290년(충렬왕 16)에 다시 정당문학으로 개칭되었다.

 

정당문학의 임명은 정당문학은 중앙 정부에서 임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3품 이상의 관료가 임명되었다. 정당문학은 중서문하성의 중요한 관직이었기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 임명되었다.

 

정당문학의 역할은 정당문학은 중서문하성의 업무를 보좌하고, 중요한 국가 사무를 처리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몽골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 찬성사(贊成事)

찬성사는 고려시대 문하성(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의 정 2품 관직으로, 宰相(재상)의 역할을 했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의 약칭으로, 시랑찬성사(侍郎贊成事)와 찬성사의 상하 구분이 있었지만 둘을 합쳐 찬성사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찬성사의 임명은 찬성사는 왕의 재가를 받아 임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3품 이상의 관료가 임명되었다. 찬성사는 국가의 중요한 직책이었기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풍부하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 임명되었다.

 

찬성사의 역할은 찬성사는 왕의 측근으로서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행정, 군사, 재정 등 모든 사무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외교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