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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홍주이씨 4세. 이연수(李延壽). 고려 후기에 우승선. 행영중군도지병마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관리

by gwangyeob5958 2024. 9. 10.

❏ 홍주이씨 4세. 이연수 (李延壽)

❍ 본관 :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 사망 : 1227년(고종 14년)

❍ 주요관직 : 우승선(右承宣), 행영중군도지병마사(行營中軍都知兵馬事), 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이부사(太尉門下侍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 수태보주국(守太保柱國), 문하시중(門下侍中)

홍주이씨 4세 이연수

 

 

 

❏ 고려사 기록

- 1222년 1월 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太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吏部事)로 임명.
- 1223년 1월 26일 수태보 주국(守太保 柱國)으로 임명.
- 1224년 1월 12일 이연수(李延壽)를 수태보(守太保)로 임명.
- 1227년 1월 26일 태자부(太子府)를 세우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연수(李延壽)와 참지정사(叅知政事)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책(冊)과 인(印)을 하사하였다.
- 1228년 2월 7일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연수(李延壽)가 사망하였다.(날짜는 양력)

- 이유성의 4대손인(족보에는 6세손, 어떤 문헌에는 5세손) 이연수(李延壽)는 고려 고종 3년 요(遼)[거란]의 침입 때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또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文下平章事)와 판리부사(判吏部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까지 올랐다.

 

- 7세 이사청(志靑) - 우복야 (右僕射). 행정 수행 기구인 상서성에 딸린 정2품
- 8세 이득자(得滋) - 평장사. 의결기구 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
- 9세 이영분(永芬) - 전객시(典客寺). 중요한 손님을 모시는 일을 하는 관청.

❏ 생애 및 활동사항

고려 후기에, 우승선, 행영중군도지병마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본관은 홍주(洪州)로, 1203년(신종 6) 하정사(賀正使)로서 금나라에 파견되었으며, 1216년(고종 3) 거란유종이 침범하였을 때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으며, 우승선(右承宣)으로 행영중군도지병마사(行營中軍都知兵馬事)가 되어 나갔다.

 

당시 금산왕자(金山王子, 거란)의 군대가 북방 변경에 침입했으므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을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師)로, 조충(趙冲)을 부원수(副元師)로, 우승선(右承宣) 이연수(李延壽)를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로 임명하여 5영(領)의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출처] 고려사(高麗史) 103 열전(列傳)

 

1221년 12월 태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올랐으며, 다음해 12월 수태보 주국(守太保柱國)이 더해졌다. 1227년(고종 14) 정월 태자부를 세우고 책과 도장을 하사하였을 때 그는 문하시중이었으며, 같은 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

도지병마사(都知兵馬事)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군사 지휘관이다. 고려시대에는 절도사에 소속되어 병마를 관장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중앙군의 전투 동원을 위해 조직된 5군(五軍)의 지휘관이었다.

 

고려시대의 도지병마사는 절도사의 부하로서 절도사의 명을 받아 병마를 지휘하고 관리하였다. 절도사의 관할 구역 내의 군사 및 군수 물자를 관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참여하였다.

 

조선시대의 도지병마사는 중앙군의 전투 동원을 위해 조직된 5군(五軍)의 지휘관이었다. 5군은 중군(中軍), 전군(前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후군(後軍)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군의 도지병마사는 해당 군의 병마를 지휘하고 관리하였다.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참여하였다.

 

도지병마사의 품계는 고려시대에는 3품 이하의 관직이었고, 조선시대에는 4품 이하의 관직이었다.

도지병마사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병마를 지휘하고 관리

- 군수 물자를 관리

- 전쟁에 참여

 고려사절요 기록

참지정사 정숙첨을 행영중군원수로 삼고, 추밀원부사 조충을 부원수로 삼고, 승선 이연수를 도지병마사로 삼아, 영의 군사와 마필을 이에 소속시켰다. 또 서울 사람으로서 직업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무릇 종군할 만한 자는 소집하여 모두 부오에 소속시키고, 또 중을 뽑아 군사를 삼으니, 모두 수만 명이나 되었다. (고려사절요 고종 - 병자 3년(1216)

❏ 행영중군도지병마사(行營中軍都知兵馬事)

행영중군도지병마사(行營中軍都知兵馬事)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임시로 설치된 군사 지휘관이다. 전쟁이나 반란 등 국가적 위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설치되었으며, 전쟁의 수행이나 반란의 진압을 위해 병력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의 행영중군도지병마사는 3품 이상의 문관이나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중앙군과 지방군을 총괄하여 지휘하였다. 조선시대의 행영중군도지병마사는 4품 이상의 문관이나 무관이 임명되었으며, 중앙군을 중심으로 병력을 지휘하였다.

행영중군도지병마사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전쟁이나 반란의 수행 또는 진압을 위한 병력의 지휘 및 관리

- 군수 물자의 관리

 

행영중군도지병마사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행영중군도지병마사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 고려시대 : 1216년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연수, 이의민 등이 행영중군도지병마사로 임명되었고, 1231년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최우, 이의민 등이 행영중군도지병마사로 임명되었다.

- 조선시대: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순신, 권율 등이 행영중군도지병마사로 임명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김상헌, 이괄 등이 행영중군도지병마사로 임명되었다.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는 고려시대의 최고 재상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를 겸임하고, 6부(吏部, 兵部, 刑部, 戶部, 禮部, 工部) 중 하나인 이부(吏部)의 판사(判事)를 겸임하는 관직이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는 국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6부 판사를 겸임하여 해당 부서의 업무를 관장하였고, 국방, 재정, 법률, 인사 등 국가의 모든 분야에 관한 중대사를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는 고려시대의 최고 관직으로서, 그 지위와 권한은 매우 막강하였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는 국왕과 함께 고려의 정치를 주도하였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 이자겸: 1126년(인종 4)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어 고려의 정치를 장악하였고, 1127년(인종 5)에는 국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다가 실패하였다.

- 최충헌: 1196년(신종 1)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어 고려의 정치를 장악하였고, 1218년(고종 6)에는 묘청의 난을 진압하여 고려의 명운을 연장시켰다.

- 정몽주: 1392년(고려 공양왕 3)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되어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다가 삼봉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는 고려시대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관직으로서,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 태자부

1227년(고종 14) 정월, 고려 고종은 자신의 아들인 염(念)을 태자로 책봉하고, 태자부를 설치하였다. 태자부는 태자의 교육과 보좌를 담당하는 관청으로서, 문하관과 무관으로 구성되었다.

 

문하관은 태자의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무관은 태자의 군사 교육을 담당하였다. 태자부의 설치는 고려의 후계자 교육을 위한 중요한 조치로 평가된다.

 

1227년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앞두고 있었다. 고종은 태자부의 설치를 통해 태자를 후계자로 육성하고,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태자부의 설치는 고려의 후계자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태자부는 이후 고려의 역대 태자들에게 교육과 보좌를 제공하며, 고려의 왕위 계승을 원활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1227년 정월 태자부의 설치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고려사 기록

- 14년 봄 정월 戊午 立太子府, 遣門下侍中李延壽, 叅知政事金就礪, 賜冊印.

戊午는 1227년 1월 2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1227년 1월 2일에 태자부를 설치하고, 문하시중 이연수와 참지정사 김취려를 보내 태자 책문과 인장을 하사하였다.

이 기록은 태자부의 설치가 고종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자부의 설치와 함께 태자의 책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