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얼리즘 연극의 정수(精髓)를 되살린 주호성 연출의 <소작지>
옛날 우리의 선조들의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을 잘 표현한 연극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과 웃고 울기도 하면서 내내 연극을 보았네요.
삼동역의 아들의 연극도 연극 선배님들의 이끄심으로 소작농의 비애를 알리는 진가를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연장이 제작하고 성남문화재단이 주관한 노경식 작, 주호성 연출의 연극 <소작지>를 11월 9일 성남아트센터 앙상블시어터에서 2회 연속 관람하며 기획자로서 뿌듯함을 느꼈다.
낮 2시 공연은 서인석 정아미 이한위 등 시니어 배우들이 주축을 이룬 무대였고, 저녁 6시 공연은 변지석 박수아 장문규 등 오디션에서 선발된 젊은 배우들이 주역을 맡은 무대였다.
두 공연은 경륜에서 우러나는 깊이와 아우라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지만, 공통점은 사실주의 연극의 감동을 되살려냈다는 것이다.
리얼리즘 연기의 특징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무대 위의 상황을 관객들이 현실처럼 받아들여 웃고 울며 감동을 느낀다는 것인데, 필자는 두 차례 공연에서 사실주의 연극이 주는 정서와 감정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특히 그것이 우리네 삶의 진솔한 묘사에서 우러나왔다는 점에서 이번 <소작지>가 주는 의미가 컸다.
한국 근현대극의 역사는 리얼리즘 연극의 토착화였으며, 1970~80년대까지도 사실주의 연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시대가 변하긴 했지만 최근 한국 연극계에서 사실주의 연극의 원형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전통 역시 단절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다행히 이번에 대연장과 성남문화재단이 합동공연을 통해 근래 보기드문 사실주의 연극을 되살려 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주의 연극의 퇴조는 시대 변화가 큰 요인이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도 한 요인이었다. 많은 배우를 모으고 사실적인 무대를 재현하려면 제작비 등 현실적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붕괴되어 민간에서는 시도조차 어렵게 되었다.
70세 이상의 원로연극인들의 모임인 대학로 연극인 광장(대연장)의 회원들은 리얼리즘 연극의 전성기를 체험한 세대들이다. 특히 배우들은 그 정서가 몸에 배어있다. 친목모임으로 자족했던 회원들이 공연을 해보자고 나선 것은 바로 자신들의 연륜과 경험을 살려보고자 하는 욕구였을 것이다. 다행히 자력으로 어려운 작업을 문화도시 성남의 성남문화재단(대표 서정림)이 합동공연을 제안함으로써 성사될 수 있었다.
첫 작품을 노경식 작가의 <소작지>로 정한 것도 우리 이야기를, 우리 정서로 보여주자는 의미였다.
1979년 6월 극단 고향의 박용기 연출로 초연한 <소작지>는 일제 강점기에 수탈당하고 짓밟히는 힘없고 무지한 소작농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폭로한 작품이다. 조상이 일궈온 땅을 지키려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과 무언의 저항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희곡으로, 제1회 전국지방연극제에서 전남 대표 광주팀이 공연해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잘 연출할 적임자로 주호성 배우를 택한 것은 그가 초연 때 일제 앞잡이 마름으로 민초를 괴롭힌 사 주사 역을 빼어나게 했고, 2021년 자신의 극단인 원에서 장봉태 연출로 이 작품을 공연한 것도 참고가 되기는 했다. 그는 성우에서 출발해 희극에서 진가를 발휘해온 배우지만 대학극부터 프로연극은 물론 생활연극까지 두루 연출해왔을 뿐 아니라 특히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이 컸다는 점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호성 연출이 자신이 의도한 사실주의 연극을 무대에 구현할 수 있게 뒷받침 해준 행운의 한 수는 성남문화재단이 대연장 원로들만으로는 안되는 젊은 캐릭터와 아역을 오디션을 통해 선정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 준 것이었다.
지난 9월에 실시한 오디션에 234명이 지원, 이틀간 실연과 면접으로 성인 12명과 아역 5명을 선발해 배역에 맞는 연령대의 배우들을 캐스팅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성남에 거주하는 배우들을 과반 넘게 선정함으로써 성남문화재단이 의도한 성남지역 예술인 활성화도 실현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호성 연출은 오디션에서 역량있는 배우들을 선발할 수 있게 되자 당초 원캐스팅으로 하려던 방침을 OB팀과 YB팀으로 이원화하고, 총 3회 공연 중 YB팀에 1회를 할애함으로써 성남지역 연극인들의 사기 진작과 젊은 배우들의 기회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필자도 오디션에 참여해 느낀 것은 전문 교육을 받은 연극 인재는 많으나 챌린지할 기회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다. “오디션 현수막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는 지원자의 말처럼 역량 있는 배우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도 이번 합동공연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원로들의 원숙함과 지역 연극의 활성화를 접목시킨 이번 합동 공연은 이상적인 콜라보의 사례로 한국연극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본다.
공연 후 가진 뒷풀이에서 젊은 연극인들은 “원로 배우들의 연륜에서 우러나는 연기를 배우며 학교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체득하며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번 <소작지>는 대연장의 명배우들과 함께 젊은 배우들이 의미 있는 화합의 무대를 통해 관객들에게 신구세대가 조화를 이룬 더욱 풍성한 무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고 본다. 이번을 계기로 지역 예술계와 지속적인 연계를 통한 지역예술인 활동을 활성화하는 프로젝트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호성 연출은 초반부터 사실주의 연극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소작지>의 무대가 전라도의 한 마을이란 특성을 살려내기 위해 호남 사투리 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광주 출신의 이한위 배우가 이 작업을 맡아 전 출연진이 호남의 정서와 어투를 갖추게 해 토속적인 아우라를 살려내려 한 것이다.
민병구 작가에게 무대미술을 의뢰해 일제 말기의 농가를 세우는 등 사실적인 무대에 역점을 두었다. 소품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 농촌의 수확 현장에서 나락이 달린 볏단을 구해와 사실감을 살렸다.
여기에 조명아티스트 신호가 새벽 안개까지 내려앉는듯한 심도있는 조명으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공연에 대한 리뷰는 10월말 성남아트센터 연극연습실에서 관람한 최종 리허설에 관한 페이스북 글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일부를 다시 인용했다.
당시 필자는 “사실주의 연극의 정수(精髓)”라는 거창한 표현을 썼는데 본 공연을 본 소감 역시 “사실주의 연극의 본령에 접근한 클래식한 공연”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연극 <소작지>는 20여명의 배우들의 집단 앙상블, 서인석 정아미 배우의 혼신의 연기, 주호성 연출의 힘이 조화를 이룬 웰메이드 무대로 손색이 없었다.
일제 치하지만 마누라와 자식 셋을 두고 소작농으로 꿋꿋이 사는 공차동은 실성한 금동할배가 저수지에 빠져죽고, 지주의 앞잡이 사 주사의 농간에 딸 점순이를 일본인 몸종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살뜰한 부인마저 농락당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우직한 뚝심으로 땅을 지켜낸다. 동생 삼동이 황해도 광산으로 가자하는데도 땅을 택했던 차동은 마을사람들이 남부여대하고 만주로 떠나자 허탈에 빠진다.
이같은 스토리를 주호성 연출은 장면장면 강약의 흐름으로 리드미컬하게 이어가면서 주역들의 팽팽한 연기 대결과 집단 앙상블로 우리네 서민들의 고달프지만 인정이 넘치는 삶의 모습을 절절하게 무대에 그려냈다.
특히 금동할배의 장례를 상여소리 구슬프게 집단 연기로 끌어낸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사 주사에게 당한 곡성댁과 공차동의 대결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였다. 사 주사를 쳐죽이겠다고 날뛰는 동생 삼동과 이를 말리는 공차동의 힘겨루기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혈육의 정이 느껴졌을 뿐아니라 연극예술의 특징인 현장 아우라를 한껏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에 사 주사에게 당한 더러운 몸을 저수지에 던지려는 곡성댁 정아미를 힘으로 제압하는 공차동 서인석의 심리전과 몸싸움 장면도 이 연극의 백미로 꼽을만 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젊은 시절 무대를 펄펄 날랐다가 이제는 70을 넘긴 원로배우 서인석의 연기력은 여전히 살아 움직였고, 관객의 감정을 휘저었다. 연습 때 힘들어 했던 그는 무대에 서자 나이도 뛰어넘었고 힘도 부치지 않았다. 연극으로 다진 배우답게 대사와 연기가 몸에 붙어나와 연기가 리얼했다. 전라도 사투리가 어색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캐릭터를 명징하게 살려냈다.
“여그는 울 엄니 아부지 산소가 있는 내 고향이란 말이여. 추석 대명절이 돌아오면 산소에 벌초는 누가 있어서 헐 것이여? 선산을 버린 놈은 삼대를 굶어 죽이는 것이여”
온갖 수난에도 땅을 지키려는 독백은 명연기였다.
그의 처 역을 맡은 곡성댁 정아미 배우는 사건의 절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에서 온몸을 던져 연기했다. 자신을 덮치는 사 주사를 돌로 칠 기회도 있었지만 그 순간 땅에 집착하는 남편 공차동이 생각나 자기를 희생하는, 자기 주장이 있지만 가족을 위해 참는 질박한 여인상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특히 일본인 지주에게팔려갔다 도망나온 딸을 삼촌과 함께 새벽 열차에 실어보내는 이별 장면에서 강인한 모성이지만 딸 점순(강민주)이 “엄마 죽지 마!”하는 장면에서 그도 관객도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삼동이 역을 맡은 이기복 배우의 연기가 단연 눈에 띄었다. 40대의 연극계 기대주인 그는 대사나 연기도 막힘이 없었지만 소작농의 비애를 알리는 긴 독백에서 화술의 정석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
YB 공연에선 공차동 역을 변지석, 곡성댁 역을 박수아, 사주사 역을 장문규, 점순 역을 김민수가 배우가 했다. OB 공연이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면 이들 YB팀은
젊은 활력의 산뜻한 아우라를 안겨주었다. 특히 정확한 발성과 대사로 젊은 세대들이 구사하지 못하는 사실주의 메소드 연기를 해냈다는 것도 이 공연의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디션으로 선발한 아역들인 동식(서정우), 막동(도슬찬), 금순(장하윤), 칠복이(산수아), 금동(이서윤)의 캐스팅은 어두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아역들은 자신의 캐릭터를 자신감 넘치는 대사와 연기로 똑부러지게 해냈다. 특히 남기오 작곡의 신곡을 합창하는 장면, 고향을 등지고 타관으로 떠나는 동무들 끼리 애틋하게 이별하는 장면에서 아역들의 존재가 빛났다.
이번 성남의 <소작지>가 특별한 이유는 어린이에서 청년, 노인까지 적역 위주로 캐스팅되었기 때문이다. 대연장의 60~70대 노련한 배우들이 마을주민들로 울타리를 쳐주고, 오디션으로 선발한 젊은 배우들과 아역들이 한 가정과 마을의 다양한 연령대 구성원을 맡아 근래 드문 대극장 무대의 앙상블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대연장과 성남문화재단의 합동공연은 원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에 젊은 배우들의 혈기가 더해져 살아 움직이는 무대를 보여줄 수 있다었다는 것이 이번 <소작지>의 큰 수확이다.
특히 연극 자체 제작은 처음이라는 성남문화재단이 연습실과 극장, 홍보와 관객 관리 등 창제작 환경을 조성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줌으로써 완성도 있는 무대, 감동이 있는 사실주의 연극을 보여 줄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출처 : 정중헌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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