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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이희건(李希建). 본관은 홍주(洪州). 아버지는 홍평군(洪平君) 이종장(李宗張). 이괄의 반란군 격파(길마재, 현재 서울 안산 무학재)

by gwangyeob5958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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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건(李希建)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중식(仲植). 아버지는 홍평군(洪平君) 이종장(李宗張, 충주목사, 임진왜란때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이다.

 

무과에 급제, 안주목사로 있다가 한때 견책을 받아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로 좌천되고, 뒤에 선천부사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용천부사로 있을 때 부원수 겸 평안병사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 장만(張晩)을 따라 반란군을 길마재[鞍峴]에서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홍양군(洪陽君)에 봉하여졌다.

용골산성(평안북도 염주군과 피현군, 출처 : 지식백과)

 

 

❏  생애 및 활동사항

❍ 무과에 급제, 안주목사로 있다가 한때 견책을 받아 평안도우후(平安道虞候)로 좌천되고, 뒤에 선천부사가 되었다. 

 

❍ 1624년(인조 2) 용천부사로 있을 때 부원수 겸 평안병사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원수 장만(張晩)을 따라 반란군을 길마재[鞍峴]에서 격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홍양군(洪陽君)에 봉하여졌다.

 

 반란이 평정된 뒤 임지에 돌아가 용천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비하여 손수 앞장서서 백성과 함께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쌓았다.

 

❍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안주가 함락되어 적이 깊숙히 들어오자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적진에 뛰어들어 일전을 결심, 운암(雲巖)에 이르러 한판 승부를 겨루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 그 뒤 반인(叛人) 장사준(張士俊)을 죽인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용골산성에서 적을 물리치고, 승첩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전일 이희건의 산성 수축이 큰 도움이 되었다. 뒤에 부민(府民)들이 그 공덕을 찬양하여 비를 세웠다.

 

❍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용천의 충렬사(忠烈祠),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렬(壯烈)이다.

 

❍ 다음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史書『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희건(李希建이) 용천 부사가 된 지 한 달 만에 군사를 거느리고 장만을 따라 이괄을 추격할 때에 항상 여러 장수의 머뭇거리는 것을 탄식하였다.

 

안현(鞍峴, 지금의 서울 안산) 싸움에 이괄의 군사가 벼랑을 타고 올라오는데, 공이 뛰어난 포수를 다섯 겹으로 앞에 세우고 활 쏘는 사수는 뒤에 있게 하고 명령하기를, ‘적병이 멀리 있거든 활을 쏘고, 10보 밖에 오거든 비로소 포를 쏘라’ 하였다.

 

화살이 비 내리는 것 같았는데도 적병이 화살을 무릅쓰고 올라오니 한 군사가 10보가 되기 전에 포를 쏘았다.

이에 공은 그 군사를 손수 베었다.

 

조금 뒤에 적병이 10보 밖에 이르자 많은 포를 함께 쏘니, 적병이 마침내 무너졌다.

적이 이미 평정되자 공이 그날로 회군하여 용천으로 돌아가려 하니 사람들이, ‘어찌 승전을 아뢰어 상을 논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국토를 지키는 신하로서 부득이 임지를 떠나왔는데, 이제 적을 평정하였으니 어찌 돌아가기를 늦출 수 있겠소’ 하고,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일찍이 말하기를, ‘용천(龍川)은 적이 침입할 때의 요충지대(要衝地帶)가 되는데 고을에 굳게 지킬 만한 성참(城塹)이 없다. 용골산(龍骨山)은 지형이 매우 험하니, 만약 진지를 구축하고 양식을 쌓아 두었다가 급한 때에 들어가 지키면, 여개(餘玠)의 조어성(釣魚城)의 승리를 앉아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정에 청하여 5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몸소 나무와 돌을 지며 아전과 군사들을 시켜 여섯 달이 지나서 공사를 마쳤다.

 

정묘년 봄에 청인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는데, 여러 진지에서 대항하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이미 깊이 들어왔으니, 성은 지킬 수 없다’ 하고, 몸을 던져 싸움터로 달려갔는데, 운암(雲岩)에 이르러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공은 벼슬에 있을 때 청렴 검소하였다.

비록 심한 추위에라도 다만 겹저고리와 홑바지만을 입었으며, 발에는 버선이 없이 신을 신었다.

여행할 때는 침구가 없고, 다만 20년 된 양가죽 옷을 말안장 뒤에 묶어 달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배를 덮고 잤다.” [출처] 이희건(李希建),작성자 문화메신저.

❏ 이희건의 묘비

황해남도 연안군 자양리에 있다. 1721년(경종 1년)에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전사한 용천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의 무덤에 세운 비석이다.

 

이괄의 난에서 활약한 정충신(충남서산), 남유/남이홍(당진), 남이웅(세종시 금남면), 성이헌(공주), 이수일(충주), 김완(논산), 이수백(경기도양평) 등은 남한에 있어 묘비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이희건의 묘비는 황해에 있어 찾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 이괄의 난

❍ 이괄의 생애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인조반정으로 반정공신이 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일으킨 무관이다. 본관은 고성(固城)[1], 자는 백규(白圭)이다.

 

이괄은 1587년(선조 20) 진사(進士) 이제(李磾)와 어머니 동래 정씨 정순하(鄭淳蝦)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괄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문신 집안이었는데 족보에 따르면 이괄은 이암의 8대손이라고 한다.

❍ 이괄의 난

1624년 1월(조선 인조 2년)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정치적인 혼란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

조선 역사에서 한성(현 서울특별시)과 경기도가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한성을 점거한 유일무이한 반란이다. 또한 도성을 점거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고도 실패한 유일한 반란이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뒤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로 갈라졌다. 

공신들 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한명련·정충신·기자헌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괄은 아들 전이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자,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인 후 1만 2,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압송되고 있던 한명련을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온 관군에게 길마재(지금의 서울 안산)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죽음을 당함으로써 반란은 실패했다.

❏ 용골산성 (龍骨山城)

북한 평안북도 염주군과 피현군에 있는 조선시대 에 개축된 고구려의 성곽 및 산성이다. 북한 국가지정문화재국보급 제62호이다.

용골산성 (龍骨山城)

높이 4m, 너비 4m, 길이 1.8㎞의 규모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내성의 평면은 타원형이며 둘레는 약 670m이다.

 

성벽은 돌을 한 줄로 쌓은 단축성벽이다. 사각추형으로 다듬은 성돌로 면과 선을 잘 맞추어 견고하게 쌓았다. 이 성벽은 조선시대에 고쳐 쌓았으므로 고구려식 축조형식은 성벽의 밑바닥 부분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외성은 내성의 남쪽벽을 북쪽벽으로 삼고 내성에 붙여 쌓은 둘레 약 2.5㎞의 장방형 성으로, 외성은 1692년(숙종 18)에 쌓았다.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위가 평평한 평가퀴이며 2∼4m간격으로 활쏘는 구멍[射穴]을 하나씩 내었다.

 

내성에는 북문과 서문, 외성에는 동문과 서문이 있으며 또한 내성과 외성 사이를 통하는 문이 있다. 내성 동남부에서는 샘이 솟아난다. 

 

용골산성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수천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오는 후금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승리한 곳으로 유명하며, 이희건(李希建)의 용골산성 수축이 큰 도움이 되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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