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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이종장과 아들 이희립(李希立)과 함께 전사

by gwangyeob5958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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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

충주목사 이종장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홍주(洪州)이고 자는 문경(文卿)이다. 

 

156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1591년에는 신천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주목사 겸 조방장(助防將)을 제수받고서 도원수 신립(申砬)을 따라 출정하였다가 탄금대 전투에서 사망했다.

탄금대 충렬사

 

 

 

신립은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려하였는데, 이종장과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은 들판에서의 교전이 불리함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기마병을 활용하여 보병인 왜병을 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지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신립은 전사하고, 이종장도 아들 이희립(李希立)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종장은 임진왜란 초기의 충주 방어에 큰 공을 세웠으나,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함으로써 그의 충절은 후세에 길이 전해졌다.

 

이종장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충주시에는 충렬사가 세워졌으며, 이종장은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무강(武剛)이다.

☐ 병조판서

병조판서는 조선시대 6판서(六判書)의 하나로, 병조의 수장으로 정2품 당상관으로, 군사와 통신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병조판서는 작전계획, 병기의 생산관리, 무관의 인사권 등 국방을 총괄하여 담당했으며, 수레와 말 등의 교통수단, 봉화와 역참 등의 통신수단, 궁궐 경비 등도 담당하였다. 지금의 국방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역할을 수행했다.

❏ 탐금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 ‘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해 양진명소(楊津溟所)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라고 실려 있는 탄금대는 신라 때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라 부른다.

 

충주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에 있는 명승지입니다. 2008년 7월 9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42호로 지정되었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은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맞섰으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탄금대의 주요 볼거리는 다음과 같다.

 충렬사 : 충주목사 이종장과 아들 이희립의 충절을 기리는 사당

☒ 탄금대 전적공원 : 탄금대 전투의 상황을 재현한 공원

☒ 우륵공원 :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 탄금대 전망대 : 남한강과 탄금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 주소 : 충주시 탄금대안길 33

❏ 탄금대전투

○ 탄금대(彈琴臺)전투(1592. 4. 28.)​

○ 조선군 : 도순변사 신립(申砬,1546~1592)​, 순변사 이일,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 휘하 8천병력

● 왜군 : 고니시 유키타카, 소 요시토시 휘하 1만8천7백 - 왜 제1군병력

신립 장군이 마지막 순간 강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희생이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선산과 상주를 함락하고 문경으로 진격해왔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한 뒤 충주 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를 정찰한 뒤에 작전 회의를 열었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새재와 탄금대 중에 어느 쪽이 유리할 것인지 묻자, 김여물이 먼저 대답하였다.

“왜적은 큰 병력이지만 우리는 작은 병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보다 지형이 험한 새재의 양쪽 기슭에 복병을 배치해 틈을 보아서 일제히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로 돌아가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자 이종장(李宗張) 또한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적이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넓은 들판에 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불리할 듯싶고, 이곳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교란한 뒤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의 의견은 달랐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들판에서 기마로 짓밟아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술이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의 진을 쳐야 합니다.”

 

그 후 그는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결국 왜군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돼 있지 않음을 알고서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결국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거느렸던 신립은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맞아 탄금대에서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였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신립은 결국 이 탄금대 싸움에서 패하고 자결하고 말았는데, 그때의 상황이 <선조실록> 25년 4월 17일 자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유성룡은 이어서 “내가 조정에 있을 때 ”도성은 긴 강으로서 요새를 삼아야 하는데, 충주가 한강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도성을 보존할 수 없다. 이 보다 앞서 신립이 조령鳥嶺의 요새에 웅거하여 충주를 견고하게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적을 평지에 끌어들여 성 아래에서 싸우다 여지없이 대패하여 열흘 동안에 삼도三都(서울. 개성. 평양)을 모두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 문경새재(鳥嶺, 새재)

​경북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사이에 둔 고개로 높이는 642m이다. 

문경제 조령

 

문경새재는 조령을 순우리말로 읽은 것으로,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마역봉(920m)과 깃대봉(835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1966년에는 문경 조령 관문이 사적으로, 1981년에는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탄금대 전화번호 : 043-848-2246 | 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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