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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홍주이 씨 13세. 이길종. 남원 성산으로 입향하게 된 한 맺힌 사연

by gwangyeob5958 2024.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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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이 씨(洪州 李氏)가 홍성에 본관을 두게 된 것은 700여 년. 현재 전국에 10만 명이 살고 있고 홍성에는 4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종친회 측은 밝히고 있다. 

 

이는 1993년 조사를 토대로 기록한 <홍성군지> 증보판에 255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종친회 측에 따르면 홍성군에는 갈산면 운곡리에 35호 등 78호가 거주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구항 75호, 홍동 35호, 금마 32호, 홍북 35호, 광천 10호, 장곡 25호, 서부 18호, 은하 15호, 결성 10호, 그리고 홍성읍에 100여 세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또 북한에도 2000여 세대가 분포돼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주 이씨 시조는 유성(維城). 1081년 개경(현 개성)에서 출생해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무관이면서 유교에도 뜻이 깊었으며 '안평(安平) 이 씨 시조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홍주 이씨의 홍주 토성화는 유성의 9 세손인 이기종(李起宗)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기종은 고려 충열왕 때 등과 하였으나,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홍주 수란동(현 홍동면 수란리)에 정착 홍주 이 씨의 계보를 정리하여 가계를 세우며 입향조가 된다. 

 

그의 묘가 홍동면 수란리에서 11km 떨어진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선경에 있다. 따라서 현재 홍동면 수란리, 금당리 일대 홍주 이 씨가 장손(금동파)이다.

 

이기종은 슬하에 장남 이성(晟), 차남 이서(舒), 삼남 이표(表) 등 아들 셋을 둬 후손을 퍼뜨리며 홍주 이씨의 파를 형성하게 된다.

 

 

 

 장남 이성

장남 이성은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특히 경서에 능통하여 사람들이 오경사(五經사) 부른 것이 호가 된다. 오경사 성은 문과에 급제해 제주, 삼척도호부사, 수원녹사, 국자박사 합문지후 등 요직을 맡았으나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고향인 홍주로 내려와 경서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조선조 이태조가 조정에 나오기를 청했으나 사절하고 근처의 산과 전답을 내주었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묘소는 장곡면 행정리에 있다. 

 

이성의 큰 아들 이제(蹄·호 야옹), 둘째 아들 이기(호 매성)도 학행이 높아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기의 후손들은 '매성공파'로 현재 구항면 남산 등지에 모여 살고 있는 등 매성공파가 홍주 이씨의 25% 정도가 된다.

 차남 이서

기종의 둘째 아들 이서(1333~1410)는 홍성의 토성들을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의 홍주 이 씨 인물조에 유일하게 기록될 정도로 홍주 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홍주 이 씨의 70% 정도가 이서의 후손들이다. 

 

서의 자는 맹양, 호는 송강, 시호는 문간이다. 이성계를 도와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는 등 조선왕조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안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문간공 이서(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서는 이태조의 '함흥차사'와 관련된 인물로 문중은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일화는 태종이 함흥으로 문안 사신을 보내면 그때마다 태조가 사신들을 죽여버렸다. 이때 태조가 이서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태종이 즉시 이서에게 글을 보내 함흥으로 갈 것을 재촉했다. 

 

이서는 태종의 명을 받고 함흥으로 떠나 강변에 말을 매어 놓은 다음 단소를 불어 태조가 듣도록 하였다. 태조가 귀에 익은 단소 소리로 그를 알아보고, 이서를 불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하였다. 

이서는 배알하고 시를 한 수 올렸는데, 태조가 이 시를 듣고 지난날에 군신 간에 있던 일을 회상하는 동안 강변에 매어 놓은 말이 계속 울어댔다. 

 

그러자 태조는 "말이 왜 저렇게 우느냐"고 물었다. 이에 이서가 "그 말이 얼마 전에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를 떼어놓고 와서 그것을 생각해서 슬피 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태조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려 즉시 서울로 환궁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자마풍간(子馬諷諫)'이라고 한다. (<홍주대관>300쪽에서)

 

문간공 이서는 또한 부친 병환을 낳게 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리고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고 세상을 뜬 후의 시묘살이까지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효자여서 조정에서 정려를 짓고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태조의 명으로 1397년 경성 홍문서동에 효자비를 세웠고 이서의 둘째 아들 신유의 효자비도 나란히 세워졌다.

 

이서의 묘는 장곡면 지정리 지명동에 있다. 이태조가 부조의 특전을 베풀어 경서에 지어 봉사했던 사당은 1869년 묘소 아래에 이건한 뒤 2000년 도비 등을 지원받아 오경사, 문간공, 병사공 삼 형제의 사당으로 확장중건하면서 '안평사'로 개칭했다. 효자비각 '효승각'도 1768년 장곡면 지정리 묘 옆으로 이건 됐다.

 

평안남도 강서, 진남포, 함경북도 함흥 등지에 2000세대 정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홍주 이 씨는 이서의 장남인 직장공의 후손일 것으로 종친회는 보고 있다. 또 이서의 동생으로 기종의 삼남인 병사공파의 후손은 전국적으로 10%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출처 : 홍성신문 내포타임스(http://www.hsnews.co.kr)

 삼남 이표

병사공(兵士公)의 벼슬에 올라 무관으로 활동

❏ 홍주이 씨 9세  이기종. 洪陽府院君(홍양부원군) 

홍주 이(李)씨 대호군  휘 이길종(吉從)님의 후손인 이종인. 대호군께서 한양과 홍주를 떠나 남원 성산(城山), 현재 장수군 산서면 봉서리로 하향하시게 된 한 맺힌 사연이다.

▶ 홍주. 홍성 입향조 

1308년 고려 25대 충렬왕께서 왕위에서 물러나자 내시연경궁제학 벼슬을 하직하고, 홍양(洪陽) 홍주. 홍성의 홍동 수란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여, 능성 구(具)씨와  사이에  아들 셋을 낳았다.

■ 홍주이 씨 10세

장남 이성(오경사공) 차남 이서(문간공) 삼남 이표(병사공) 10세 문간공  휘 이서(舒)께서는 무안 박(朴)씨 사이에도 분을 낳았다.

 홍주이 씨 11세 

장남 이신지(직장공) 차남 이신유(정당문예) 차남 이신유께서는 연안 안(宋)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 딸 한 분을 낳았다.

 홍주이 씨 12세 

장남ㅡ이계조(병사공) 

차남ㅡ이승조(목사공) 

삼남ㅡ이업조

딸ㅡ이소연(진주 소 씨 행정공)

남원 진주 소(蘇)씨의 80%가 행정공의 후손. 만도리는 진주소 씨 생원공파이며,  행정공의 친형님으로 생원공파는 안동네, 보절 서당골, 호복동 소 씨들임.

 

장남  홍주이 씨 12세 이계조께서는 진주 정 씨와 혼인하였으며, 진주 정씨 부친은 세종 때 대제학 정이오 대감이며, 하륜과 같은 진주가 동향이다. 정부인 진주 정씨의 형제가 단종 1년, 즉위년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진주 정씨  정분이다.

❏ 대호군 이길종, 홍주 이 씨 13세. 남원 성산으로 입향하게 된 한 맺힌 사연

장남ㅡ이길종(대호군) 

차남ㅡ이경종(목사공) 

 

13세 대호군 이길종께서는 홍성에서 잘 살고 계시다가 1453년 계유년 (음) 10월 10일에 수양대군이 정난을 일으켜 문종의 고명대신인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을 죽이고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13세 대호군 이길종의 외숙이 되신 우의정 정분 대감도 죽임을 당해야 했으나, 정난 전에 하삼도 충청전라경상도 체찰사로 지방 순시를 가셨기에 10월 10일 밤 죽임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바로 체포되어 전라도 순천 근처 낙안으로 유리안치되는 유배구금상태에서 1454년에 죽임을 당했다.

대호군 이길종묘소, 홍주 이 씨 13세.

 

처남이 정인지가 대호군 이길종의 외가댁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리며 집안이 풍비박산을 당하자, 우의정 정분의 형제자매들도 동시에 연좌제에 걸려서 그 무서운 화를 피해야 할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 홍주 이 씨 정당공의 장손 대호군 이길종에게로 밀어닥쳤다.

 

대호군 이길종은 모친이신 진주 정 씨를 계유정난의 화를  피해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삶의 터전 홍주 홍성을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 정 씨 모친과 장손 대호군 이길종이 화를 피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남원 성산이었다.

 

왜 남원으로 피신하였을까요?? 

남원 성산에는 대호군의 고모님이 그곳으로 시집을 가셔서 살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 고모님은 11세 정당공 이신유의 여식으로 홍주이 씨 12세 고모님의 부군 고모부는 진주 소 씨 이연 소연으로 호는 행정이다

 

문간공 이서께서 소연이 9살 때 1400년 즈음에 시의  운자를 주시니 소연은 즉석에서 한 편의 시를 지어 올릴 정도로 총명하여 문간공 이서께서 행정 이란 호를 내려주셨고 나중에 소연을 손서, 손녀사위로 맞아들였다.

조카 대호군 이길종께서는 고모님이 사시는 곳으로 올 수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대호군 이길종께서는 진주 정 씨 모친을 모시고 홍성 한양에서 1453년 추운 겨울날에 남원 성산으로 입 향하게 된 한 맺힌 사연이 있다.

대호군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종3품 관직으로, 관계상으로는 건공(建功)·보공장군(保功將軍) 등으로 별칭되었다. 고려 때의 대장군이 조선 초기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개칭되었다가 태종초 대호군으로 변개되었다. 1466년(세조 12) 종3품관으로 확정되어 오위의 고급지휘관으로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 당시는 그 정원이 14인이었으나 후기사회로 내려오면서 2인이 감해져 12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위가 유명무실화됨으로써 보직이 없는 문무관이나 여러 잡직 등에 무직을 띠게 하여 체아록(遞兒祿) 등이 주어졌다.

 

『속대전』에 배정된 수를 보면 직무가 없는 자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원록체아(原祿遞兒) 2인, 친공신(親功臣) 5인, 공신적장(功臣嫡長) 2인, 남우후(南虞候) 1인, 선전관(宣傳官) 1인, 사자관(寫字官) 1인 등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데백과사전)

❏ 우의정 정분 대감

이계조께는 처가 가 있는 진주 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시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두 분 사이에 아들 둘을 낳으셨는데 홍주이 씨 13세이다.

▶ 우의정 정분

정분(鄭苯, 1394년 ~ 1454년)은 조선초기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이며 3 상신(相臣) 중 한 명이고 문종의 고명대신이다.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 시호는 충장(忠莊),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정이오(鄭以吾)의 외아들이고, 부인은 하동 정 씨 정흥인의 딸이며 정인지의 누나이고 1452년 이전에 사별(死別)했으며 이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지정(池淨)은 생질(甥姪)이고 정지산은 종질이며 봉사손이다. 

 

정분(鄭苯)은 정치적 수완이나 권력 탐욕(貪慾)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신으로는 드물게 토목, 건축에 뛰어난 관리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 3도 도제 찰사로 임무 수행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맞아 충주에서 낙안으로 압송되어 이듬해 교형을 당했으며, 영조 22년(1746년) 복관 된 후 시호는 곧은 충성(忠)과 기개와 큰 절의(莊)로 충장(忠莊)이니, 우의정 충장공 정분(右議政忠莊公 鄭苯)으로 공주 요당서원(公州 蓼堂書院)에 제향 되고 장릉(단종) 배식록에 수록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요당서원

공주 요당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서, 그의 아들 김굉필, 그리고 김종서의 문인인 김안국을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1544년(중종 39)에 김굉필의 문인인 이황이 김종서와 김굉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창건하였고, 1574년(선조 7)에 사액(賜額)을 받아 요당서원으로 명명되었다.

 

요당서원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건축과 조경이 뛰어나 조선 후기의 서원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우(祠宇)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이 대청이고, 측면 2칸이 협실입니다. 사우의 앞면에는 김종서와 김굉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뒷면에는 김안국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사우의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동재에는 김종서를 흠모한 문인들의 시비가 걸려 있다.

요당서원은 1973년 12월 2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08호로 지정되었다.

 

관계상으로는 건공(建功)·보공장군(保功將軍) 등으로 별칭되었다. 고려 때의 대장군이 조선 초기 도위첨사(都尉僉事)로 개칭되었다가 태종초 대호군으로 변개되었다. 1466년(세조 12) 종3품관으로 확정되어 오위의 고급지휘관으로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 당시는 그 정원이 14인이었으나 후기사회로 내려오면서 2인이 감해져 12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위가 유명무실화됨으로써 보직이 없는 문무관이나 여러 잡직 등에 무직을 띠게 하여 체아록(遞兒祿) 등이 주어졌다.

『속대전』에 배정된 수를 보면 직무가 없는 자에게 녹봉을 주기 위한 원록체아(原祿遞兒) 2인, 친공신(親功臣) 5인, 공신적장(功臣嫡長) 2인, 남우후(南虞候) 1인, 선전관(宣傳官) 1인, 사자관(寫字官) 1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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