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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이씨

호암서원[湖岩書院].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서(李舒)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심구령, 안성, 이소연, 소산복, 이당 등 6현의 위패 서원

by gwangyeob5958 2024. 9. 11.

 호암서원[湖岩書院]

조선 숙종 초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서(李舒), 심구령(沈龜齡), 안성(安省), 소연(蘇沿), 소산복(蘇山福), 이실(李宲)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남원 진전방(眞田坊) 성산(城山) 아래에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9년(정조 1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함과 동시에 호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유허지에 위패를 묻고 제단을 마련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61년에 복원하였다.

- 지정종목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1984년 4월 1일 문화재 제55호 지정)
- 지정일 : 1984년 4월 1일 
- 소재지 :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682-1번지 지도 
- 시대 : 조선시대

호암서원(전북남원덕과)

 

 

❏ 송강 이서(李舒)

송강 이서는 자는 양백(陽伯), 호는 당옹(戇翁), 본관은 홍주(洪州), 시호는 문간(文簡), 봉호는 안평군(安平君)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군부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1392년(태조 1)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조선 개국 공신 3등에 올라 안평군에 봉해졌으며 형조전서에 올랐다. 1394년(태조 3) 신덕왕후가 죽자 3년 동안 능을 수호하고 문하부참찬사가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1402년(태종 2) 벼슬을 사임하고 승려 설오와 함께 함흥에 갔던 태조를 맞이하였고, 1404년 우정승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영의정이 되었다.

❏ 심구령(沈龜齡, 1350∼14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자는 천석(天錫), 호는 병담(屛潭), 본관은 풍산이다.

1350년(충정왕 2)에 출생하였다. 1398년(태조 7) 대장군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을 도와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하였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4등에 봉해지고 1408년에는 우군동지총제가 되었다. 

 

1408년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 남해안에서 왜구를 격파하였다. 1909년 천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풍산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일찍부터 태종을 호종하였다. 신분은 비록 미천하였으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직임을 잘 알았으며, 부하들에 대한 통솔력도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 안성(安省, ?∼14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아버지는 기(器)이다, 고려 우왕 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 (우왕 6)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현비(顯妃)의 시호를 잘못 지어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 소연(蘇沿)

진주 소(蘇)씨, 호가 행정(杏亭)으로 1390년(공양왕 2)에 출생하였다. 노성현감(魯城縣監ㅡ논산)을 역임하였다. 

 

문간공 휘 이서(舒)의 손녀사위(손서 孫壻)가 되신다. 문간공께서 소연(蘇沿)이 9세 때 행정(杏亭)이란 호를 지어줄 정도로 총명하였고, 훗날 손녀딸과 혼인시켜 줌.

 

행정공 소연(蘇沿)은 홍주 이(李)씨의  남원 입향조 13세 대호군 휘 이길종(吉從)의 고모부가 되신다.

 

대호군(大護軍)이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의 화(禍)를 피해 홍성에서 ~ 남원 성산(城山)으로 도망올 때~ 홍주 이(李)씨 11세 정당공 휘 신유(愼猷)의 딸 12세 고모와 고모부 소연(蘇沿)이  남원 덕과면 신양리 호암천 가까이 살고 있었고, 친정 조카 대호군이 화(禍)를 당하자~ 신양리 뒷산 성산(城山) 아래 척동尺洞에 자리 잡게 도움을 주셨다. 

❏ 소산복(蘇山福)

진주 소(蘇) 씨 생원공파 후손이고, 자는 경응(慶應),  호는 매헌(梅軒)으로 1556년(명종 11)에 남원 덕과면 만도리에서 출생하여,  산수동 진사進士 이성춘(李成春ㅡ홍주이 씨 16세 국은공(菊隱公), 산수동 입향조, 송탄공 이점(李漸)의 부친, 1556년 진사 급제, 산수동으로 입향) 에게 글을 배우고, 형 소해복(蘇海福)과 함께 정읍시 북면에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머리가 명석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과 산학(算學)에 조예가 깊었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재(高才) 김천일 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의주 행재소를 왕래하기도 하였다. 

 

직산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병으로 돌아왔고, 뒤에 부모 상(喪)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느라 종군(從軍) 하지 못하였다. 김천일 장군이 진주에서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함께 죽지 못하였음을 통탄하여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덕과면 만도리 향리에 집을 지어 편액을 ‘문류정(門柳亭)’이라 하였다. 

 

당시의 선비들인 민여주, 오정길, 김선(경주김씨 수은공파, 김선의 아들과 홍주 이 씨 이점李漸 송탄공의 딸과 혼인하여 사돈관계), 이점(李漸, 홍주 李 씨 17세, 송탄공 松灘公, 1591년  진사시 급제, 1591년에 안동네 만동 마을 출신 매헌 소산복과 함께 ), 안창국, 최행, 양명원, 안극충 등과 어울리면서 만년을 보냈다. 

 

1620년 만동 마을에서 사망하였고, 죽마고우 친구인 홍주이(李)씨 송탄공 점(漸)께서 친구 매헌의 묘비문(墓碑文)을 지으셨다.

❏ 이실(李實)

주벽인 문간공(文簡公) 이서(李舒, 홍주이 씨 10세)의 후손(홍주 이李 씨 18세, 부친은 17세 송탄공 휘 점(漸)의 둘째 아들)으로 호는 죽암(竹庵)이다.

 

1623년 인조 1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덕행이 높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강화가 성립되자 통탄하고 돌아왔다. 54세 졸(卒) 사망 하심. 묘소: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산수동 주벽등(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유정(門柳亭)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 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 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 문유정 시판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 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 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호암서원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682-1